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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이태원에서 불타는 금요일을 보낸 후, 나는 토요일을 앓았다.

언제부턴가 소주를 조금 과하다 싶게 먹으면 다음날 두통이 따라오는데 저번 토요일이 그랬다.

우측 골이 띵-하게 아려오는 이 느낌.


새벽 4시까지 홍콩 게하 모임을 하고 마지막까지 남은 S와 H를 집에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잠이 들었었다. 그리고 깼을 때가 10시쯤인가.


홍콩 게하 단톡방에는 술이 덜 깬채 알바를 간 사람도 있고

오후 일정에 맞춰 부랴부랴 대구로 복귀하는 사람도 있고

오랜만에 들린 서울풀이를 하듯 다음 약속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고

다들 이래저래 바쁘면서도 서로를 챙기며 오늘도 화이팅하자 한다.


나도 그 속에서 ㅋㅋㅋㅋㅋㅋㅋ 하고 웃으며 애들과 대화를 하지만

머리가 띵해져오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그러고보니, 저번 홍콩게하 모임 다음날도 이렇게 머리가 아팠었는데..

이 친구들이랑 놀면 워낙 분위기를 잘 타다보니 소주도 평소보다 더 먹게 되는 것 같다.

하긴, 전 날은 정말 소주가 잘 넘어갔던 날이긴 했다.


테이블에 소주가 없을떄 내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사왔던 것만 3병이니까.

그리고 먹던 사람만 먹었으니까, 거의 나랑 H랑 S랑 셋이서 다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덕에 이렇게 두통에 시달렸던 거겠지, 끙.


그렇게 꼬박 하루를 앓다가도 저녁이 되어서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감싸며

오늘 저녁은 뭘로 때울까, 하다가 문득 매운 닭강정이 먹고 싶어졌다.


집 근처에 거의 2주에 1번은 꼭 가는 닭강정집이 있는데 7천원인데 박스가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담아주신다.

거의 대학생 1학년때 황금마차 옆 닭강정 포장마차 만큼 인심있게 담아주신다.

덕분에 가성비를 꼼꼼히 따지는 내 소비벽에서도 인정을 받은 곳이다.


좀비처럼 몸을 일으켜 1층으로 내려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일터이고 춥다하더라도 집에서 걸어서 5분남짓 거리이니 감수하기로 한다.

체육복 바지와 빨간 점퍼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에라이, 춥다, 망할.


감수하기로 한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추위를 쫓으려 발걸음만 빨라진다.

구겨신은 슬립온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내 족적을 바닥에 남긴다.


닭강정 집에 들어서는데, 내가 끼니때이면 남들도 그러하다는 걸 증명하듯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뜨끈한 김이 나는 국밥을 드시고 계셨다.


내가 때를 잘 못 맞춰왔구나 라는 생각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아저씨는 이내 수저를 놓으며 뭘 드릴까요, 라고 물어오셨다. 그 모습에 매운 양념 중자를 부탁드리고 뻘쭘히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벽 한 켠에 걸린 티비에선 중화영화인 듯 알 수 없는 쏼라쏼라 소리가 들려오고 아주머니는 조심스레 수저를 움직여 뜨끈한 국물에 말린 밥을 드시더라.

아저씨는 양념이 가득 든 말통을 들어 철판에 양념을 붓고 슥슥 비벼대며 달구더니 이내 튀겨진 닭강정을 그 위에 놓고 쉐킷쉐킷해주신다. 시뻘건 양념이 이리저리 뒤엉키며 닭강정에 코팅되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뻘쭘해서다. 차라리 식사때가 아니었다면 그러려니 했을텐데..

하필 스마트폰도 집에 두고 나온터라 그 시간이 그리 길 수가 없었다.


곧이어 떡강정이 추가되고 연갈색이던 닭강정들이 먹음직스럽게 붉어졌고 작은 박스에 담겨 내 앞에 놓이게 되었다. 식사를 대충 끝내신 듯 아주머니가 다가와 카드를 받아가고 결제를 해주신다. 그리고 건내지니 닭강정 비닐을 들고 얼른 나섰다. 손님이 빨리사라져야 식사를 제때하시지 싶었다.


쌀쌀한 날씨다. 손에 들린 닭강정의 냄새가 솔솔히 올라온다.

그대로 들고 동네 마트로 들어갔다. 닭강정을 먹으면 양념때문에 물을 많이 먹게 되는데 집에 물이 없어서, 물을 좀 사가려고 들렸다.

그러다가 1000ml 두유가 개당 천원이길래 3개를 얼른 집고 2L 짜리 물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는데 문득 라면코너가 눈에 띄었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난 왠만해선 라면을 먹지 않는다.

살찔까봐, 기피하는 품목 1순위가 라면이다.

다만 여행이나 MT, 산행을 갈때는 예외다. 먹는 걸 자제할 뿐 싫어하는 음식은 아니니까.

오히려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음식이다. 어릴때는 한 끼에 라면 4개도 거뜬히 먹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 덕에 살이 띵글띵글하게 쪘어서 관리를 시작한 이후에는 잘 먹지 않는 음식이다.


근데, 그 날 따라 이상하게 끌린다.

분명 손에 매콤한 향을 풀풀 풍기는 닭강정이 들려있는데도 라면이 끌린다.

특히 참깨라면. 고소한 계란블럭이 풀려서 부드러운 면과 씹히는 그 맛이 갑자기 생각난다.


어쩌면 손에 들린 닭강정보다 라면을 먼저 봤다면 오늘 저녁은 라면을 먹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참깨라면 2개는 어느새 계산대에 올려져서 바코드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핳핳…


내가 라면이 먹고 싶어서 사다니, 별 일이 다 있네 라고 생각하며 물과 두유와 함께 봉투에 담는다.

오늘은 닭강정을 먹어야 하니 내일 라면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라면이 오늘의 시작이었다.


닭강정을 사온 토요일은 맛있게 잘 먹었다.

양념은 여전히 내 입에 맞을만큼 적당히 매콤했고 예상대로 양념맛 때문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일요일 아침이 밝기 전에 2L 짜리 물통이 텅 빌 정도로 마셨다.


그렇게 맞이한 일요일.


점심쯤 시작한 기술블로그 포스팅은 몇 번의 버그와 시행착오를 거치며 흘러가기 시작했다.

실제 블로그에 댓글 기능을 추가하고 추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포스팅을 작성하고

포스팅을 작성하다보니 또 추가적인 사안이 나오고 그걸 구글링해서 찾아서 해결하고 또 그거에 대해 포스팅을 하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6시가 되어있었다.


아, 배고프다. 라면 먹어야지.


부엌으로 가 냄비를 꺼내고 물을 조금만 받아 인덕션에 올려놓았다.

실제로 물을 끓이는 건 커피포트.

인덕션은 화력이 약해서(아니, 애초에 화력이라 부르기도 애매하다만)

라면 2개분량의 물을 끓이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테니 커피포트로 끓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물은 금새 끓고 참깨라면 2개는 반틈씩 동강나서 고운 스프가루와 함께 팔팔 끓는 물 속으로 풍덩했다.

봉지에 4분을 끓이라고 했으니 4분을 끓일 참이었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첫 번째 방법은 배가 고플때 먹는 것이고

두 번째 맛있게 끓이는 방법은 봉지에 적힌대로 끓이는 거다.


그래서 물도 딱 1L로 맞췄고 면도 넣으라는대로 넣었다.

이제 남은 건 4분여를 기다리며 면을 휘휘 저어주는 것 뿐.


그러다 문득, 뭔가 더 넣을 게 없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화근이었다.


그럴떄면 으레 하는 짓이지만, 냉장고를 뒤적인다.

김치가 있었던가, 계란은 있었던가, 면발이 부드러워지게 우유를 넣을까.

요새 우유콜라라면이 그렇게 흥하던데 콜라를 좀 사올껄 그랬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냉동실문을 열었는데


떡하니 보이는 그 놈의 만두, 군만두.


아,그래 이 녀석이 있었지?

라고 생각했던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인셉션처럼 책을 엎었어야지 미래의 나야.

어쩌자고 내가 그 만두를 꺼내서 물에 씻겨서 붙은 얼음을 때내고

전자렌지에 30초로 2번 돌리고 팔팔 끓는 라면에 넣는 걸 보고만 있었니.


아니, 그래 그때까지도 좋아.

최소한 내가 그걸 냄비뚜껑에 덜어서 수저로 3분할 해서 후후 불면서 입에 넣을때까지만이라도 말렸어야지.



그렇다.

이 만두는, 내 뱃속에 들어간 이 만두는 유통기한이 무려 2017년 11월이었다.

오늘이 3월 26일이니, 유통기한으로부터 4개월정도가 지난 만두였다.


물론, 유통기한이라 함은 시장에 제품이 유통되는 기한을 의미하니 실제 보관기간은 그보다 더 하겠지만, 유제품류가 일주일인가 그랬으니 식품류인 만두는 아마 그보다 더 짧으면 짧았지 길진 않을 거다.

꽤나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냉동실에서 꽁꽁 얼어있었으니 괜찮겠지. 2월에 구워 먹었던 만두는 괜찮았잖아? 그러니 이 두개도 괜찮을거야, 라는 안일한 생각.


취업전 본가에서 지낼 때, 우리집 냉동실에 있던 꽁꽁 언 어묵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께 늘 그런 이야기를 했다. 식료품 얼렸다고 너무 방심하고 이 요리 저 요리에 넣지말라고. 아무리 얼렸어도 대장균이다 뭐다 오래된 음식은 될 수 있으면 안 먹는게 좋다고.

그래 놓고, 이제는 내 살림 내가 하면서 얼렸으니 괜찮아 라는 내로남불성 사고방식을 보이다니, 어쩌면 그로인해 벌을 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먹을 때는 참 맛있었다. 그만큼 오랜만에 먹는 라면이었고 옛날식으로 냄비뚜껑에 덜어서 후후 불며 먹었다.

얼마나 맛있었던 지 국물 한방울 남김없이 꿀꺽이며 다 먹었다, 정말 깨끗하게.


그렇게 깔끔하게 라면 2개와 만두 2개를 해치우고는 바닥에 늘어지듯 누워버렸다.

배는 부르지, 등은 따시지, 몸은 편안하지. 그야말로 수면의 늪에 들어가기에 적기 중에 적기였다.

그렇게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난 것이 새벽 1시였다.

이전 글인 새벽 4시에 썼던 그 시간이었다.


그렇게 밀린 글을 쓰고 회사를 갔다. 아니, 가려고 했었다.

원래 목표였던 지하철은 5시 50분의 첫 지하철. 그 지하철을 타기 위해 30분쯤 옷을 주섬주섬 입으려는데 뱃속에서 급작스런 율동이 전해졌다. 실 하나가 풀린 듯 어딘가 삐그덕대는 마리오네트의 움직임마냥 불편한 꿈틀거림이었다. 아, 이 꾸륵거림을 참고는 집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 것 같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화장실로 향했고 어쩔 수 없이 5시 50분 지하철은 거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뱃속사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원스레 퐁퐁대며 아이들은 저 멀리 떠나갔고 나는 아린 배를 부여잡고 무사히 출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출근을 해서는 예정대로 지하 헬스장에서 트레드밀 위에서 40분간 땀을 쫙 빼는 운동을 하고는 올라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오는 2차 진통.


그때부터였다,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은


결국 그 이후로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종합검진 받기 전에 맺었던 절친이 나를 다시 찾아온 느낌이었다.

난, 별로, 반갑지, 않은데, 말이다.


결국 나는 그제서야 아 만두가 잘 못 된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맹신했던 내 오장육부는 이젠 그렇게 강하질 못 했고 4개월이 지난 만두의 노쇠함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모형이 말하길

만두에는 야채야 고기가 모두 들어있지. 말하자면 종합선물세트 같은거야.

너는 그 선물을 받은 거고. 다만, 슬퍼지는 선물이었을 뿐이야.


그 이후는 주변에서 나를 본 사람들이 생생히 증언을 할 수 있을 만큼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너무 속을 비우니 다리가 풀린다는 걸 처음 알 수 있었고 제대로 앉을 수 없음은 물론이요

앉았을 뿐인데 자리가 저려오고 무언가를 먹는 다는 게 무서워지는 시간이었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은 고작 2정거장이었지만 그 사이마저 서 있는 게 힘들어서 주저않고 싶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문에 기대 서 있다가 옆에 앉은 분에게 양해를 얻어서 앉을까 라는 생각을 십수번 했을 정도니까.

그 상태로 집에 돌아와서는 또 제 상태가 아니었지.


알 사람은 알겠지만 내 집은 복층이고 1층은 공부하는 공간+옷장이고 2층이 쉬는 공간인데

쉬려고 2층에 누워있으면 진통이 온다. 그리고 화장실은 1층에 있다. 계단을 내려온다. 층계를 밟는다.

속이 쿵, 다리가 후들, 으윽하는 신음이 나오고 벽을 짚으며 중력이 나를 이끄는대로 내려온다.


…..


고난도 고난도 이런 고난이 없다.

난 왜 굳이 4개월이나 지난 아이를 꺼내먹었던가. 아니, 것보다 분명 2월(이것도 이미 유통기한이 3개월을 넘겼을 시점..)에 꺼내먹었을 땐 괜찮았는데 그 사이 냉동실에 무슨 대격변이 있었길래 내 배는 이리도 처량하게 풍랑을 맞은 쪽배마냥 들썩이고 요동치는 것인지 누가 자신있으면 A4 2페이지 폰트 15정도로 간략하게 정리를 해줬으면 싶겠다. 그게 하다 못해 박사논문급의 영문서라도 읽어보면서 내 뱃속 상태와 만두 속의 고기, 야채, 당면의 유해성분과 그를 감싼 만두피의 실질적 유통 후 보관기간을 따져 다음부터는 마지노선을…

…이라는 헛 생각을 몇 번이나 하면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실, 이 글 조차 진통이 왔던 월요일(26일)에 쓰기 시작해서 그 이후로 부들부들 떨며 시체처럼 집에서 누워서 앓으며 지내다가 토요일(31일)이 되어서야 진정이 된 속을 어루만지며 마무리를 짓고 있다.

아, 이번주는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어 하고 지나온 내 뱃속 사정을 돌이켜 본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지쳐있지 않고 퀭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

세상에 사람이 누워있는 게 그렇게 편안하고 온 몸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자세라는 걸 느껴본 건, 21살때 맹장수술을 하고 침대에 누워지냈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 같아.

맹장수술조차 3일만에 끝났는데 만두는 5일을 가벼이 넘겨 내일이면 일주일을 찍는구나.


여러분, 먹는 음식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냉동되었다고 함부로 막 먹고 그러면 안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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