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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생각./Essay

그 곳에 도착해서.

Blindr_grey 2018. 12. 31. 10:26

이 글은 군인이던 시절, 병영문학상 수필부문 응모작 중 하나입니다.

취침시간에 당직사관 몰래 모포 뒤집어쓰고 후레시로 비춰가면서 썼던 기억이 나는데...

9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새삼스럽네요.


슈우웅.

한 뼘 가량 열린 창밖을 한 톤짜리 트럭이 지나가며 매캐한 바람을 선사한다. 선갈색의 의자들이 열을 맞춘 관광버스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앉아있다. 모두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이 버스에 오른 것이겠지. 그것이 개인만의 일이든, 다수간의 일이든 간에 말이야.

 

“흐응‥.”

 

그럼 난 왜 이 버스에 타고 있는 거지?

 

“엄마! 바다! 바다아!”

 

앞자리에 앉은 여자아이가 신기한 듯 창가에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깨어있는 탑승객들 모두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돌려진다. 태양이 정말 빨간색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바다위로 쏟아지는 햇살들은 마치 깨진 유리창을 보는 것처럼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다도해라불리는 남해의 별칭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바다에는 크고 작은 녹색수풀들이 머핀처럼 솟아나 있었다.

곧이어 기울어져서 떨어지기 직전의 낚시용품점 간판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도로의 양사이드로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야자수들이 가로등처럼 서 있었다.

처음 저 나무를 봤을 때는 지금 꺅꺅거리고 있는 저 꼬마승객처럼 신기해했었는데.

쏟아져 내리는 햇빛아래, 한가로이 광합성을 하는 야자수가 몇 그루나 지나갔을까, 곧이어 지금까지 나오던 논·밭들이 없어지고 동구 밖 천하대장군처럼 오만하게 서있는 빌딩들이 나타났다.

 

“다‥왔나.”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가슴 언저리에 담겨 오래된 시소처럼 삐걱거린다. 잠시 손에 들린 핸드폰을 열어 멍하니 바라봤다.

 

편지버튼. 2. 네자릿 수. 확인.

 

전문서적의 목차처럼 끝없을 것 같은 목록이 나타난다.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해보지 않아도, 짧은 몇마디만으로 내용들이 눈에 보일 듯 스쳐지나간다. 아마 수십번은 봤을 문자들이니까.

 

“다 왔습니다.”

 

담배를 꽤나 핀 듯 걸걸한 운전수 아저씨의 목소리가 실내에 퍼졌다. 꼬마아이의 목소리에도 깨지않던 이들이 저 낮은 음성은 잘도 알아들었는지 하나,둘 깨어나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챙긴다. 반짝세일 물품을 기다리는 주부들처럼 좁은 복도에 선채 버스를 나섰다.

 

- 통영시외버스터미널.

 

하얀 바탕에 파란색으로 양각된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시 와버렸구나. 2년전, 다시는 올 일이 없을 줄 알고 돌아섰었는데.

짭잘한 바다 내음이 코를 간질이고 남해의 순풍이 뺨을 어루만져준다, 마치 내가 온 것을 반겨주듯이.익숙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공기 내음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 버스터미널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내 기억이 머무르는 곳은 여기뿐만이 아니니까.

타지임에도, 익숙한 터미널을 나와 익숙한 길을 나선다. 너에게 도착을 알리던 공중전화가 보이고 헤어질 때 밀크퀘이크를 사먹던 제과점이 보인다. 전국 어느 터미널 근처에나 있는, 항상 서로 딴청을 피우며 서둘러 지나쳤던 모텔가를 지나자 제법 큰 3차선 4거리가 나온다.

 

“여기‥아직 있네.”

 

늘 그래왔듯 ‘개조심’이라고 적힌 경고문 옆을 빙 둘러 돌아간다. 개는 딱 질색이라는 말에 늘상 겁쟁이라며 놀려대던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져 씁슬하다 생각되는 미소를 지어본다. 멍하니 선 채로 날 보던 검은 실루엣이 양팔과 다리를 벌리고는 녹색으로 환히 웃는다. 조금 넓은 도로를 건너 우체국을 지나쳤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대형할인마트의 정문.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이 할인마트를 드나들며 자신의 일을 보고 있다. 정문을 담당한 검은정복의 청년이 나를 힐끔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문득, 바닥을 한번 쳐다본다.

지금의 이 자리,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었다.

고개를 들어 끝없이 푸른 남해, 통영의 하늘을 쳐다본다.

 

그때는, 그날은‥

시리게 가녀린 가랑비가 내려와 분홍빛 우산을 쓴 네가 서 있었다.

혹시 너도 오늘 우연히, 정말 우연히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이 곳을 찾지는 않았을까.

아니‥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심부름따위의 일로 이 곳을 지나진 않을까.

티 없이 맑은 시야사이로 오버랩되던 뿌연 빗무리가 걷히며 너도 함께 사라져간다.

 

“하긴‥”

 

혹시 나의 기억을 따라 걷다보면 만날까, 오늘이 가기전에.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기억을 따라서 걷다보면.

 

“어디부터‥가볼까.”

 

너를 만나길 바라는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곳에 도착해 다시 걷는다.

언젠가 너와 함께 손잡고 걸었던 붉은 보도블럭 길, 그 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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